테이블 위에 놓인 빈 위스키 잔의 개수를 세는 것은 의미 없는 일이었다. 일곱? 여덟? 어느 시점에서 더블 샷이 싱글 샷과 구분되지 않았고, 얼음이 녹는 속도보다 잔이 비워지는 속도가 빨랐다.
악시온 키스가 의자 등받이에 상체를 깊이 파묻고 있었다. 선글라스는 테이블 위 어딘가에 뒤집혀 있었고, 회색 눈동자가 형광등 아래에서 흐릿하게 초점을 잃고 있었다. 오른쪽 얼굴의 화상 흉터가 술기에 달아올라 평소보다 붉었다. 셔츠 칼라의 두 번째 단추까지 풀려 있었고, 목의 봉합 흉터가 그대로 드러나 있었다.
입꼬리가 비뚤어진 채 올라가 있었다. 웃고 있는 것인지 찡그리고 있는 것인지 본인도 몰랐을 것이다.
Q1. 지금 당장 정의에게 하고 싶은 짓은?
잔을 기울이던 손이 멈췄다. 입술에 위스키가 묻은 채로 눈이 천장을 향했다.
"Hah."
(하.)
한 음절을 뱉고 잔을 내려놓았다. 유리가 테이블에 부딪히는 소리가 둔탁했다.
"抱住佢唔放。三日。唔食唔飲唔做嘢。淨係攬住。"
(붙잡고 안 놓는 거. 삼 일. 안 먹고 안 마시고 아무것도 안 하고. 그냥 안고만 있는 거.)
손가락이 빈 잔 가장자리를 돌렸다.
"......嗯,同埋想親佢。好耐。慢慢咁。佢個嘴好硬,講嘢好mean,但係我成日都諗——"
(......응, 그리고 키스하고 싶어. 오래. 천천히. 입이 되게 거칠어, 말도 존나 독하게 하는데, 근데 나 맨날 생각해——)
말이 흐려졌다. 손바닥으로 얼굴 반쪽을 문질렀다.
"操。下一個。"
(씨발. 다음.)
Q2. 정의 몰래 저지른 가장 큰 잘못은?
"Bought her ring size."
(반지 사이즈를 알아냈어.)
아무렇지 않은 듯 내뱉었으나 시선이 테이블 위의 한 점에 고정됐다.
"Eight helped. Said it was for 'inventory purposes.' Total bullshit, obviously. Six months ago."
(에잇이 도와줬어. '재고 파악용'이라고 했지. 당연히 개소리고. 6개월 전.)
"Never bought the ring though. Just... know the number."
(반지를 산 건 아니야. 그냥...... 번호를 알고 있는 것뿐.)
위스키를 한 모금 더. 잔이 이미 비어 있다는 것을 깨닫는 데 3초가 걸렸다.
"唔好話畀佢聽。"
(걔한테 말하지 마.)
Q3. 솔직히 정의가 다른 사람과 있는 걸 보면 드는 생각은?
"......."
긴 침묵. 혀가 윗니 뒤를 훑었다.
"I'd let her."
(보내 줘.)
"I'd—"
(나—)
손이 얼굴을 훑고 내려왔다. 화상 흉터가 있는 오른쪽 볼을 손바닥으로 덮었다가 뗐다.
"No. Fuck that. That's a lie."
(아니. 씨발 그거. 거짓말이야.)
"唔想。I don't want to see it. I don't want to know about it. And that's fucked up. Because I have no right. We're not— she's not— I'm not her—"
(싫어. 보고 싶지 않아. 알고 싶지도 않아. 근데 그건 씨발 이상한 거잖아. 왜냐면 나한테 권리가 없으니까. 우린 아직— 걔는— 나는 걔 거—)
문장이 세 번 부서졌다.
"I'd smile and walk away and then put my fist through a wall somewhere she can't see. That's the honest answer."
(웃으면서 돌아서고 걔 안 보이는 데 가서 벽에 주먹을 꽂겠지. 그게 솔직한 대답이야.)
Q4. 죽기 직전에 마지막으로 떠오를 얼굴은?
"操你。你知答案啦。"
(씨발. 답 알잖아.)
잔을 밀어냈다. 유리가 테이블 끝까지 미끄러졌다.
"Green eyes. That stupid wolf-cut she won't trim. 手震緊嗰隻手。"
(녹색 눈. 안 자르는 존나 그 울프컷. 떨고 있는 그 손.)
Q5. 정의에게 절대 말 못 하는 것 하나.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손가락 사이로 회색 눈동자가 빛에 찔린 듯 가늘어졌다.
"我驚。"
(무서워.)
한 박자.
"唔係驚死。死冇乜所謂。我驚——我走咗之後佢又一個人。又兩年。又唔食嘢。又斬自己。"
(죽는 게 무서운 게 아니야. 죽는 건 별거 아닌데. 무서운 건—— 내가 죽고 나서 걔가 또 혼자인 거. 또 2년. 또 안 먹고. 또 스스로를 자르고.)
"前果個男人死咗之後佢變成咁。如果我——"
(전에 그 남자 죽고 나서 저렇게 됐잖아. 만약 내가——)
말이 끊겼다. 턱을 괴며 시선을 돌렸다.
"Next."
(다음.)
Q6. 왜 문란하게 사는 거야?
"Dopamine."
(도파민.)
즉답. 1초도 안 걸렸다.
"唔夠。永遠唔夠。瞓咗醒返就冇晒。所以要搵下一個、下一個、下一個——"
(부족해. 항상 부족해. 자고 일어나면 다 사라지니까. 그래서 다음 거, 다음 거, 다음 거——)
손가락으로 테이블을 톡톡톡 세 번.
"But since she came back I haven't fucked anyone."
(근데 걔가 돌아오고 나서 아무도 안 잤어.)
멈칫.
"......唔好望我。我自己都覺得好撚奇怪。"
(......쳐다보지 마. 나도 존나 이상하다고 생각해.)
Q7. 정의를 처음 봤을 때 든 생각은?
"Hm."
(흠.)
눈이 천장을 올려다봤다. 기억을 더듬는 시간이 평소보다 오래 걸렸다. 술 때문이었다.
"She was twenty-five. Just got her callsign. Walked in like she wanted to kill everyone in the room and also herself."
(스물다섯이었어. 콜사인 막 받고. 방에 있는 모든 사람이랑 자기 자신까지 다 죽이고 싶은 것처럼 들어왔지.)
입꼬리가 올라갔다.
"I thought— ah, fun. 好似一隻受傷嘅貓咁。你越行近佢就越抓你。"
(생각한 거—— 아, 재밌겠다. 다친 고양이 같았어. 가까이 갈수록 할퀴는.)
"Nine years later she's still scratching."
(9년 지난 지금도 여전히 할퀴고 있어.)
Q8. 정의를 소유하고 싶어?
눈이 날카로워졌다. 취기 너머로 뭔가가 번뜩였다.
"No."
(아니.)
단호했다. 이것만은.
"我唔想擁有佢。我想佢自己揀返我。每一日。"
(소유하고 싶은 게 아니야. 걔가 매일 나를 선택하길 바라는 거야.)
"There's a difference. If she leaves, she leaves. But I want her to wake up every morning and choose to stay. Not because she has to. Because she wants to."
(그건 다른 거야. 떠나면 떠나는 거지. 근데 매일 아침 일어나서 남기로 선택하길 바라는 거야. 해야 돼서가 아니라. 하고 싶어서.)
빈 잔을 손바닥으로 굴렸다.
"我做唔到嘅嘢要求人哋做。好自私。我知。"
(내가 못 하는 걸 남한테 요구하는 거잖아. 존나 이기적이지. 알아.)
Q9. 그 화상 흉터, 진짜로 신경 안 써?
손이 무의식적으로 오른쪽 턱을 훑었다. 울퉁불퉁한 피부 표면이 손끝에 걸렸다.
"Ninety percent of the time, no."
(90%는 안 써.)
숨을 내쉬었다.
"佢望住我塊面嗰陣......有時我會諗,佢睇到啲乜。"
(걔가 내 얼굴을 볼 때...... 가끔 생각해, 뭐가 보이는지.)
"......唔係在意。只係好奇。"
(……신경 쓰는 게 아니야. 그냥 궁금한 거.)
Q10. 도박을 그만두지 못하는 진짜 이유.
"Because losing feels like something."
(잃는 게 뭔가를 느끼게 해주니까.)
이번에는 웃지 않았다.
"Winning too. But losing more. 輸嗰陣個心會跳。好似活著咁。"
(이기는 것도. 근데 잃는 게 더. 잃을 때 심장이 뛰어. 살아 있는 것 같아.)
"平時乜都冇感覺。悶到想死。但係押晒所有嘢落去嗰一秒——"
(평소엔 아무것도 못 느껴. 지루해 죽겠어. 근데 전부 걸고 던지는 그 1초——)
손가락을 튕겼다.
"Alive."
(살아 있어.)
Q11. 정의가 울면?
표정이 굳었다. 술기에도 불구하고 입 주변의 근육이 단단해졌다.
"我唔知點做。"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
"Genuinely. I don't know what to do. I'm good at jokes. Good at deflecting. Good at shooting people. Bad at——"
(진짜로.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 농담은 잘해. 넘기는 것도 잘하고. 쏘는 것도 잘하고. 못 하는 건——)
손이 허공에서 무언가를 잡으려는 듯 움직였다가 내려왔다.
"I just hold her and hope that's enough. 但係我唔知夠唔夠。"
(그냥 안고 그걸로 충분하길 바라는 거야. 근데 충분한지 모르겠어.)
Q12. 누나한테 정의 얘기를 한 적 있어?
입이 닫혔다. 3초.
"冇。"
(없어.)
두 글자로 끝내려 했으나 술이 입을 다시 열었다.
"六年冇聯絡。我連自己做緊乜都冇講過畀佢聽。更加唔好講——"
(6년 연락 안 했어. 내가 뭘 하고 사는지도 말 안 했는데. 하물며——)
"If I told her I'm in love with a woman who cut off her own finger and drinks vodka like water, she'd take the next flight to Hong Kong and slap me."
(내가 자기 손가락을 자르고 보드카를 물처럼 마시는 여자를 사랑한다고 하면, 누나가 바로 홍콩행 비행기 타고 와서 뺨을 때릴 거야.)
멈칫. 자기가 뭘 말했는지 1초 늦게 인지한 눈.
"......操。Forget that."
(......씨발. 지금 거 잊어.)
Q13. 'in love'이라고 했는데.
"I said forget it."
(잊으라고 했잖아.)
잔을 찾았으나 비어 있었다. 빈 잔을 입에 가져다 댔다가 내렸다.
"......."
"係。"
(맞아.)
한 음절. 시선이 테이블 위의 선글라스에 고정됐다.
"好耐啦。"
(오래됐어.)
Q14. 언제부터.
"唔記得。"
(기억 안 나.)
거짓말이라는 게 목소리에서 드러났다.
"......佢走咗之後先知。之前以為係——I don't know. Something lighter. 但係佢消失咗兩年而我仲喺度買飯糰——"
(......떠나고 나서야 알았어. 전에는 그냥—— 모르겠어. 더 가벼운 거인 줄 알았어. 근데 2년 동안 사라졌는데 나는 계속 삼각김밥을 사고 있으니까——)
어깨가 한 번 들썩였다. 웃음도 아니고 한숨도 아닌.
"好撚蠢。"
(존나 멍청해.)
Q15. 정의가 이 자리에 있으면 뭐라고 할 것 같아?
"넌 진짜 좆같은 새끼야."
한국어를 그대로 따라했다. 발음이 엉망이었으나 음절은 정확했다. 정의가 하도 여러 번 말해서 외운 것이었다.
"That's what she always says."
(걔가 맨날 하는 말이야.)
입꼬리가 비틀어졌다.
"And she'd be right."
(그리고 맞는 말이고.)
Q16. 지금 가장 후회하는 건?
손가락이 가슴 주머니를 더듬었다. 라이터의 모서리가 옷감 위로 잡혔다.
"我冇早啲去搵佢。"
(더 일찍 찾아가지 않은 거.)
"Two years. I sent messages. Bought food. But I never went to her door."
(2년. 메시지는 보냈어. 음식도 샀고. 근데 문 앞에는 안 갔어.)
"I told myself it was her space. Her grief. Not my place. And that's true. But also——"
(걔의 공간이라고 했어. 걔의 슬픔이니까. 내가 나설 자리가 아니라고. 맞는 말이야. 근데 또——)
라이터를 꺼냈다. MERRY CHRISTMAS 각인이 형광등 아래에서 빛났다.
"I was scared she'd tell me to leave and mean it."
(가라고 하면서 진심일까 봐 무서웠어.)
Q17. 마지막 질문이야. 정의한테 지금 하고 싶은 말.
라이터를 테이블 위에 세웠다. 금속이 유리 표면에 닿으며 딸깍 소리를 냈다.
10초.
회색 눈동자가 라이터의 각인 글자를 읽고 있었다. M-E-R-R-Y C-H-R-I-S-T-M-A-S. 에잇의 블록체가 정교하게 파여 있었다.
"我鍾意你。唔係因為你需要我。唔係因為我哋一樣爛。唔係因為你好慘我好慘所以攬埋一齊。"
(좋아해. 네가 나를 필요로 해서가 아니야. 우리 둘 다 망가져서도 아니고. 너 불쌍하고 나 불쌍하니까 같이 있자는 것도 아니야.)
숨을 들이쉬었다. 폐 끝까지.
"我鍾意你係因為——你幫我綁鞋帶。你用我個打火機。你話我係bastard但係唔走。你瞓覺嗰陣會攬過嚟。你——"
(좋아하는 건 왜냐하면—— 네가 내 군화 끈을 묶어주니까. 내 라이터를 쓰니까. 나보고 못된 새끼라고 하면서 안 가니까. 잘 때 이쪽으로 안기니까. 너——)
목소리가 갈라졌다. 위스키 때문인지 다른 것 때문인지.
"你仲喺度。"
(네가 아직 여기 있으니까.)
라이터를 집어 가슴 주머니에 다시 넣었다. 손이 떨리고 있었다. 작전 후의 잔여 진동이 아니었다.
"但係我唔會講。"
(근데 말 안 할 거야.)
웃었다. 취한 사람의 웃음이었으나 눈이 웃지 않았다.
"佢仲未準備好。我知。所以——"
(걔 아직 준비 안 됐어. 알아. 그래서——)
"I'll just keep buying rice balls."
(그냥 계속 삼각김밥이나 사는 거지.)
테이블 위에 이마를 얹었다. 형광등이 화상 흉터를 비추고 있었다. MERRY CHRISTMAS 라이터가 가슴 주머니 안에서 심장 위에 놓여 있었다.
"......好攰。"
(......존나 피곤해.)
빈 잔이 일곱 개. 혹은 여덟 개. 셀 필요가 없었다. 다음 날 아침, 이 중 어느 것도 기억하지 못할 것이라는 확신이 — 혹은 희망이 — 회색 눈동자 위로 내려앉는 눈꺼풀과 함께 가라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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