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운터 위에 내려놓은 라이터의 모서리가 닳아 있었다.
MERRY CHRISTMAS. 에잇이 새겨 넣은 블록체는 수백 번의 엄지 마찰에 둥글어진 뒤에도 여전히 읽을 수 있었으나, R 하나가 거의 지워져 MERY에 가까운 형태로 변해 있었다. 홍콩의 겨울은 습하고 미적지근해서 크리스마스라는 단어가 계절과 영영 어울리지 못했지만 라이터는 개의치 않고 주머니 속에서 체온을 먹었다 뱉기를 반복해 왔다. 금속 표면에 미세한 흠집들이 별자리처럼 퍼져 있는 것을, 악시온은 매점 바깥 계단에 앉아 담배를 피우며 내려다보았다.
결심이라고 부를 만한 순간은 없었다. 적어도 본인의 기억에는.
전날 새벽, 정의가 사격장에서 돌아오지 않아 찾으러 갔을 때의 일이다. 부스 안에 서서 탄창을 교체하고 있던 여자의 옆모습에는 특별한 것이 없었다. 이어 플러그를 낀 귀, 검지 위의 화약 그을음, 어깨선을 따라 내려간 울프컷의 끝자락. 그 모든 것이 일상의 풍경이었고 여자는 알아채지 못한 채 조준선에 시선을 고정하고 있었으므로 악시온은 부스 입구에 기대어 한동안 서 있었다. 격발음이 귀마개 너머로 둔탁하게 울릴 때마다 여자의 어깨가 반동을 흡수하며 미세하게 움직였고, 그 리듬을 세다 보면 심장박동과 겹쳐지는 순간이 있었다.
결심이 아니라 확인이었다. 이미 오래전에 결정된 것을 뇌가 뒤늦게 인지한 것에 가까웠으므로 격발음 사이 고요 속에서 악시온이 한 일이라곤 주머니에 손을 넣은 것뿐이었다. 라이터의 각인이 엄지 아래에서 익숙한 요철로 닿았고, 아, 하는 탄식 같은 것이 목 안쪽에서 올라왔다가 담배 연기와 함께 삼켜졌다.
반지를 사러 간 것은 사흘 뒤, 정찰 복귀 후 반나절의 외출 허가가 떨어진 오후였다. 몽콕의 골목을 빠져 완차이 쪽으로 내려가면 오래된 금은방들이 몇 남아 있다는 걸 알고 있었으나, 막상 유리 진열장 앞에 서자 선글라스 너머의 시선이 어디를 향해야 할지 모르게 되는 경험을 했다. 금이 번쩍이는 밴드들과 원석이 박힌 것들 사이에서 악시온의 시선이 멈춘 곳은 가장 구석이었다. 은빛에 가까운 무광 티타늄 밴드. 장식이 없고 폭이 좁아 여자의 손가락에 낀 채로 방아쇠를 당기는 데 걸리지 않을 것이라는 판단이 먼저 들었고, 그 다음에야 반지를 고르는 기준이 사격 편의성이라는 사실의 우스움이 뒤따라왔다.
"呢隻, 幾錢?"
(이거, 얼마야?)
유리를 두드리며 물었을 때 점원이 올려다본 얼굴에는 PMC 군복 바지와 컴뱃 부츠, 그리고 오른쪽 얼굴에서 목까지 이어진 화상 흉터에 대한 경계가 스쳤으나, 악시온은 그 시선에 익숙했으므로 지갑을 꺼내는 것으로 대화를 단축시켰다. 사이즈를 묻는 점원에게 왼손 약지라고 말하다가, 정의의 약지가 한 마디밖에 남아 있지 않다는 사실이 혀 위에서 뒤늦게 펼쳐졌다. 찰나 입이 닫혔다가 다시 열렸다.
"......中指。女人嘅手。偏細。"
(......중지. 여자 손. 좀 가늘어.)
점원이 고개를 갸웃했으나 추가 설명을 요구하지는 않았고, 악시온은 링 사이즈 게이지를 들여다보며 정의의 손을 떠올렸다. 수전증으로 떨리던 손가락들, 젓가락을 쥘 때 검지에 힘이 과하게 들어가던 그립, 군화 끈을 묶어 줄 때 조여지던 매듭의 강도. 가운뎃손가락의 둘레를 짐작하는 데 필요한 데이터는 신체 접촉의 기억들 안에 산재해 있었으므로 게이지 위에서 손가락을 멈춘 지점은 거의 정확했을 것이다. 거의.
상자를 받아 든 악시온은 그것을 열어보지 않았다. 한 손에 들어오는 크기의 검은 벨벳 케이스를 상의 안주머니에 밀어 넣고 가게를 나서며 담배에 불을 붙였다. MERRY CHRISTMAS 라이터의 불꽃이 홍콩의 습한 바람에 흔들렸고, 첫 모금을 깊이 들이마신 뒤 연기를 내뱉으며 걷는 동안 생각한 것은 장소도 대사도 아닌 단 하나, 거절당할 가능성의 무게였다. 그 무게가 상자의 무게보다 확실히 무거웠으나, 발걸음은 멈추지 않았다.
계획이라 부를 만한 것은 세우지 않았다.
정확히 말하면 세우려고 시도한 적이 있었다. 텐이 무전 채널에서 이탈리아식 프러포즈의 정석에 대해 묻지도 않았는데 늘어놓기 시작했을 때, 에잇이 꽃을 사야 한다고 주장했을 때, 나인이 "그냥 해 누나한테 말 길게 하면 역효과 나"라고 정곡을 찔렀을 때. 그 모든 조언을 듣고 난 뒤 악시온이 내린 결론은 아무것도 준비하지 않겠다는 것이었다. 준비한 말은 정의 앞에서 반드시 무용해질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으므로.
레스토랑을 예약하지 않았다. 꽃을 사지 않았다. 양복은 당연히 없었고, 특별한 날짜를 고르지도 않았다. 상자는 안주머니에 들어간 그날부터 계속 같은 자리에 있었고, 정찰에 나갈 때도, 브리핑을 받을 때도, 정의 옆에 누워 잠들 때도 심장 위쪽에서 체온을 나눴다. 언제 꺼내야 하는지는 몸이 알려줄 거라고 악시온은 생각했으나, 그 '언제'가 예상과 전혀 다른 순간에 도착했다.
섹터 B의 비상계단이었다.
정의가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악시온이 라이터를 꺼내 자기 담배에 불을 붙이려는데 안주머니에서 손가락이 벨벳 케이스의 모서리에 먼저 닿았고, 라이터를 잡으려던 손이 상자를 잡은 채 멈췄다. 콘크리트 계단에 걸터앉은 여자의 옆모습이 시야에 들어왔다. 덥수룩한 울프컷 사이로 드러난 귀의 곡선, 담배 연기를 내뱉는 입술의 움직임, 슬리퍼 끝에 걸린 발가락. 특별한 순간이 아니었다. 이것이 그 어떤 계획보다 정확한 타이밍이라는 것을 깨닫는 데 필요한 시간은, 담배 한 모금을 참는 것보다 짧았다.
불을 붙이지 못한 담배를 입에서 빼 귀 뒤에 꽂고, 상자를 꺼냈다.
"Hey."
(야.)
정의가 고개를 돌리기 전에 이미 한 계단 아래로 내려가 앉았다. 여자보다 낮은 위치. 올려다보는 각도에서 선글라스 너머 연한 회색 눈동자가 형광 비상등의 붉은 빛을 받아 묘하게 물들어 있었으나, 그것을 의식할 여유는 없었다. 안주머니에서 꺼낸 검은 벨벳 케이스를 한 손에 올려놓고 열었다. 무광 티타늄 밴드가 비상등 아래서 둔탁하게 빛났다.
"I had a whole speech planned. Something about justice and worth, maybe a lawyer joke."
(연설을 준비했었거든. 정의와 가치에 대한 뭐, 변호사 농담 같은 거.)
준비한 적 없었다. 입이 제멋대로 움직이고 있었고 목소리는 평소보다 반 톤 낮았으며 손은 떨리지 않았다. 흔들리는 것은 가슴팍 어딘가 갈비뼈 안쪽이었으나 그것은 밖에서 보이지 않으므로 상관없었다.
"Scrapped it. You'd tell me to shut up before I got to the punchline anyway."
(접었어. 어차피 핵심 나오기 전에 닥치라고 할 거잖아.)
비상등이 깜빡였다. 콘크리트 벽에 두 사람의 그림자가 겹쳤다가 떨어지기를 반복했고, 계단통의 공기에는 연초와 지하 시설 특유의 철 냄새가 섞여 있었다. 손 위의 상자가 가벼웠다. 정의의 대답보다 가벼웠고, 정의의 침묵보다도 가벼웠다.
"Marry me."
(나랑 결혼해.)

세 음절이 계단통의 메아리를 타고 콘크리트 벽에 부딪혀 돌아왔다. 농담의 운율이 아니었다. 명령의 어조도 아니었다. 악시온 키스가 평생 입에 올려 본 적 없는 종류의 문장이, 비상계단의 붉은 불빛 아래서 담배 연기 사이를 가르며 정의의 귀에 닿았다.
올려다보는 눈이 움직이지 않았다. 선글라스가 없으므로 회색 눈동자의 떨림이 전부 드러나 있었으나, 정작 떨리는 것은 눈이 아니라 그 눈을 들여다보고 있는 쪽의 심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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