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십 걸음이 99마일쯤 되는 것 같았다

철제 비상문이 등 뒤에서 닫히자 식당 안의 소음이 한 겹 얇아졌다.

에잇이 웃다가 사레들린 소리, 나인이 젓가락으로 접시 가장자리를 두드리며 부르는 음정 나간 노래, 그걸 그만두라고 못 박는 포의 독일어 억양. 벽 하나를 사이에 두고 그 전부가 물속처럼 뭉개져 들려왔다. 골목으로 나서며 목깃을 세웠다. 뉴욕의 겨울 공기는 홍콩의 그것과 질감이 달랐다. 습기가 빠진 자리에 날붙이가 들어찬 것 같은, 폐 안쪽을 긁고 내려가는 냉기. 숨을 내쉴 때마다 하얀 덩어리가 피어올라 가로등 불빛 아래서 흩어졌다.

주머니에서 라이터를 꺼냈다. MERRY CHRISTMAS. 각인된 글자 위로 가로등의 주황빛이 미끄러졌고, 뚜껑을 젖히는 소리가 골목의 정적을 한 번 깨뜨렸다. 담배 끝에 불이 붙는 짧은 순간 손바닥 안이 따뜻해졌다가 이내 식었다. 연기를 깊게 빨아들여 위쪽으로 뱉었다. 비상계단의 철제 난간과 낡은 벽돌, 그 위로 겹겹이 쌓인 광고 전단의 잔해. 어디에나 있는 종류의 뒷골목이었고, 그래서 도리어 편안했다.

복귀 후 몇 주가 흘렀다. 본부 요새의 공기 순환 장치는 여전히 같은 음역대로 울었고 훈련 로테이션은 예정대로 돌아갔으며 밀그램의 물류 루트는 두 군데가 끊겼다. 별일 없이 굴러가는 시간이란 이 업계에서 일종의 사치였다. 제로가 오늘 밤 외식을 허가한 것도 그 사치를 확인하려는 절차에 가까웠을 터. 지상으로 올라와 뜨거운 국물을 먹고 맥주를 마시고 서로를 놀리다 돌아가는 것. 별것 아닌 일과였으나 별것 아닌 일과가 가능하다는 사실 자체가 드물었으므로 아무도 불평하지 않았다.

담배를 반쯤 태웠을 때였다. 시야의 위쪽에서 무언가가 천천히 낙하했다.

처음에는 먼지인 줄 알았다. 가로등 불빛의 원뿔 안으로 들어선 그것이 궤적을 그리며 흔들리다 어깨 위에 내려앉고서야 정체가 분명해졌다. 눈이었다. 하나가 떨어지자 뒤이어 둘이, 그 다음에는 셀 수 없이. 소리가 없었다. 비와 달리 눈은 내리면서 아무 소리도 내지 않았고, 대신 골목에 이미 존재하던 소리들을 흡수해 갔다. 멀리서 지나가는 차량의 타이어 소음이 솜을 덮은 것처럼 둔해졌다. 식당 안의 웃음소리도 한 겹 더 멀어졌다.

올해의 첫눈이었다.

고개를 들어 가로등 갓 위쪽을 봤다. 검은 하늘에서 무수한 흰 점이 쏟아져 내려오고 있었고, 그 점들이 빛의 영역에 들어서는 순간에만 잠깐 존재했다가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존재를 증명받는 시간이 일 초도 되지 않는 것들. 손바닥을 펴 받아 보았다. 닿자마자 녹아 물방울조차 남기지 않았다. 담배 필터를 입술 사이에 문 채 손을 내리며 무언가를 생각하려 했는데, 무엇을 생각하려 했는지 바로 잊었다. 겨울밤에는 그런 순간이 잦았다.

비상문이 다시 열리는 소리가 들린 것은 그때였다. 고개를 돌렸다.

골목 입구 쪽에서 정의가 걸어오고 있었다.

두꺼운 야상의 지퍼를 목 끝까지 올리지 않은 채, 주머니에 양손을 꽂고. 걸음에 서두름이 없었다. 밖에 나왔으니 밖의 공기를 다 쓰겠다는 듯한 속도. 덥수룩하게 자란 흑발 위로 눈송이가 한 톨씩 내려앉았고, 녹지 않은 채 머리카락 결에 걸려 잠시 머물다 다음 걸음의 진동에 떨어졌다. 어깨 위에도 몇 개. 야상의 어두운 천 위에서 흰 점들이 유독 선명했다. 가로등 불빛을 등지고 걸어오는 터라 얼굴에는 그늘이 졌는데, 그 그늘 속에서 진녹색 눈만 빛을 받아 희미하게 반짝였다.

거리는 얼마 되지 않았다. 골목의 길이는 짧았고 몇십 걸음이면 닿을 위치였다. 그런데도.

시간이 이상하게 늘어졌다. 정의가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그 한 걸음이 부자연스러울 만큼 길게 재생되었다. 군화 밑창이 젖은 아스팔트를 딛고 떨어지는 소리, 야상 자락이 허벅지에 스치며 접히는 각도, 내쉬는 숨이 얼굴 앞에서 하얗게 피었다가 뒤로 흘러가는 방식. 그 전부가 한 프레임씩 끊겨 눈에 박혔다. 몇십 걸음이 99마일쯤 되는 것 같았다. 아니, 그보다 멀었다. 데드존을 횡단해도 이만큼 아득하지는 않았을 텐데.

멀다고 느끼는 이유를 안다.

2년이었다. 답장 없는 메시지가 세 자릿수를 넘기고, 냉장고 안에서 삼각김밥이 유통기한을 넘기고, 크리스마스가 두 번 지나가는 동안 저 사람은 어딘가의 방 안에 갇혀 있었다. 그 시간은 걸어서 건널 수 있는 종류의 거리가 아니었다. 지금 골목을 가로질러 오는 저 몇십 걸음은 물리적으로는 몇십 걸음이 맞지만, 감각적으로는 730일을 접어 넣은 길이였다. 그러니 늘어질 수밖에. 그러니 숨을 쉬는 것조차 조심스러울 수밖에.

담배가 손가락 사이에서 저 혼자 타들어갔다. 재를 털 생각도 못 한 채 그저 바라보았다. 바라보는 일에만 온 신경이 쏠려서 다른 기능이 전부 후순위로 밀렸다.

돌아왔구나, 하는 문장이 목 안쪽에서 맴돌았다. 몇 주 전에도 확인했고 그 후로 매일 확인했는데 오늘 밤 다시 확인되는 종류의 사실이었다. 걷고 있잖아. 눈을 맞으면서. 자기 다리로. 방 안이 아니라 바깥에서. 저 사람이 다시는 바깥 공기를 마시지 않기로 결정했을 수도 있었고, 그 결정을 막을 방법은 누구에게도 없었을 텐데. 지금은 야상을 입고 눈을 맞으며 이쪽으로 오고 있었다. 그 사실 하나가 심장 근처에서 뜨끈하게 걸렸다.

첫눈이었다. 살면서 첫눈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해 본 적이 없었다. 눈은 그냥 시야를 방해하고 발자국을 남기고 저격수에게 유리한 배경을 제공하는 기상 현상에 불과했다. 작전 브리핑에서 강설 예보를 들으면 짜증부터 났지, 낭만 같은 것은 계산에 들어간 적이 없었는데.

지금은 아니었다. 지금은 저 흰 것들이 정의의 머리 위에 내려앉는 방식을 보고 있었고, 그것들이 녹기 전에 손을 뻗어 털어 주고 싶다는 충동이 순전히 물리적인 형태로 손목에 걸렸다. 그 충동을 실행하려면 저 몇십 걸음이 끝나야 했다. 끝나기를 기다리는 시간이 이토록 길 줄이야.

담배를 입에 물고 연기를 뱉었다. 하얀 연기가 하얀 눈 사이로 섞여 들어가며 경계가 흐려졌다. 둘 다 곧 사라질 것들이었다. 사라지는 것들 사이에 서서 사라지지 않은 사람이 걸어오는 것을 보고 있었다.

몇 걸음 더. 이제 표정이 보일 거리까지 좁혀졌다. 정의의 코끝과 뺨이 추위에 붉게 물들어 있었고, 입가에서 하얀 김이 일정한 간격으로 피어올랐다. 눈송이 하나가 속눈썹에 걸렸다가 눈을 깜빡이는 동작에 떨어지는 것까지 보였다.

목을 한 번 가다듬었다. 입술을 열었다가 닫았다. 첫마디를 뭐라고 해야 하는지 계산이 서지 않았다. 평소라면 0.5초 안에 나왔을 농담이 오늘 밤에는 목구멍 어딘가에서 얼어붙었다. 하필 오늘, 하필 첫눈 아래서, 하필 저 사람이 저런 속도로 걸어오는 바람에.

결국 골라낸 것은 계산이 아니라 그냥 새어 나온 말이었다.

"落雪喇。"
(눈 온다.)

목소리가 예상보다 낮게 깔렸다. 광둥어를 알아듣는다는 사실을 아는 이상 영어로 바꿀 이유가 없었고, 지금 이 순간의 말은 업무 채널의 언어로 하기에 적합하지 않았다. 담배를 든 손을 살짝 들어 정의의 머리 위쪽을 가리켰다.

"你頭上面成個聖誕樹咁。"(네 머리 위가 무슨 크리스마스 트리 같아.)

말해 놓고 나서야 단어 선택이 우연이 아니었음을 깨달았다. 주머니 속 라이터에 새겨진 글자와 같은 계열의 어휘가 제 입에서 굴러 나왔다는 것. 우연을 가장할 만큼 정교하지도 못했다. 어깨를 한 번 으쓱하며 담배를 벽 쪽 재떨이 대용 캔에 비벼 껐다. 손을 털고 나니 손끝이 이미 시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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