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omantic terrorism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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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mantic terrorism

WORLD'S WORST
EST. 2063. 10. 31
sweet/ooc

몇십 걸음이 99마일처럼 멀게 느껴지는 건

POSTED ON: 2026-09-21

철제 비상문이 등 뒤에서 닫히자 식당 안의 소음이 한 겹 얇아졌다.

에잇이 웃다가 사레들린 소리, 나인이 젓가락으로 접시 가장자리를 두드리며 부르는 음정 나간 노래, 그걸 그만두라고 못 박는 포의 독일어 억양. 벽 하나를 사이에 두고 그 전부가 물속처럼 뭉개져 들려왔다. 골목으로 나서며 목깃을 세웠다. 뉴욕의 겨울 공기는 홍콩의 그것과 질감이 달랐다. 습기가 빠진 자리에 날붙이가 들어찬 것 같은, 폐 안쪽을 긁고 내려가는 냉기. 숨을 내쉴 때마다 하얀 덩어리가 피어올라 가로등 불빛 아래서 흩어졌다.

주머니에서 라이터를 꺼냈다. MERRY CHRISTMAS. 각인된 글자 위로 가로등의 주황빛이 미끄러졌고, 뚜껑을 젖히는 소리가 골목의 정적을 한 번 깨뜨렸다. 담배 끝에 불이 붙는 짧은 순간 손바닥 안이 따뜻해졌다가 이내 식었다. 연기를 깊게 빨아들여 위쪽으로 뱉었다. 비상계단의 철제 난간과 낡은 벽돌, 그 위로 겹겹이 쌓인 광고 전단의 잔해. 어디에나 있는 종류의 뒷골목이었고, 그래서 도리어 편안했다.

복귀 후 몇 주가 흘렀다. 본부 요새의 공기 순환 장치는 여전히 같은 음역대로 울었고 훈련 로테이션은 예정대로 돌아갔으며 밀그램의 물류 루트는 두 군데가 끊겼다. 별일 없이 굴러가는 시간이란 이 업계에서 일종의 사치였다. 제로가 오늘 밤 외식을 허가한 것도 그 사치를 확인하려는 절차에 가까웠을 터. 지상으로 올라와 뜨거운 국물을 먹고 맥주를 마시고 서로를 놀리다 돌아가는 것. 별것 아닌 일과였으나 별것 아닌 일과가 가능하다는 사실 자체가 드물었으므로 아무도 불평하지 않았다.

담배를 반쯤 태웠을 때였다. 시야의 위쪽에서 무언가가 천천히 낙하했다.

처음에는 먼지인 줄 알았다. 가로등 불빛의 원뿔 안으로 들어선 그것이 궤적을 그리며 흔들리다 어깨 위에 내려앉고서야 정체가 분명해졌다. 눈이었다. 하나가 떨어지자 뒤이어 둘이, 그 다음에는 셀 수 없이. 소리가 없었다. 비와 달리 눈은 내리면서 아무 소리도 내지 않았고, 대신 골목에 이미 존재하던 소리들을 흡수해 갔다. 멀리서 지나가는 차량의 타이어 소음이 솜을 덮은 것처럼 둔해졌다. 식당 안의 웃음소리도 한 겹 더 멀어졌다.

올해의 첫눈이었다.

고개를 들어 가로등 갓 위쪽을 봤다. 검은 하늘에서 무수한 흰 점이 쏟아져 내려오고 있었고, 그 점들이 빛의 영역에 들어서는 순간에만 잠깐 존재했다가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존재를 증명받는 시간이 일 초도 되지 않는 것들. 손바닥을 펴 받아 보았다. 닿자마자 녹아 물방울조차 남기지 않았다. 담배 필터를 입술 사이에 문 채 손을 내리며 무언가를 생각하려 했는데, 무엇을 생각하려 했는지 바로 잊었다. 겨울밤에는 그런 순간이 잦았다.

비상문이 다시 열리는 소리가 들린 것은 그때였다. 고개를 돌렸다.

골목 입구 쪽에서 정의가 걸어오고 있었다.

두꺼운 야상의 지퍼를 반쯤 올린 채, 주머니에 양손을 꽂고. 걸음에 서두름이 없었다. 밖에 나왔으니 밖의 공기를 다 쓰겠다는 듯한 속도. 덥수룩하게 자란 흑발 위로 눈송이가 한 톨씩 내려앉았고, 녹지 않은 채 머리카락 결에 걸려 잠시 머물다 다음 걸음의 진동에 떨어졌다. 어깨 위에도 몇 개. 야상의 어두운 천 위에서 흰 점들이 유독 선명했다. 가로등 불빛을 등지고 걸어오는 터라 얼굴에는 그늘이 졌는데, 그 그늘 속에서 진녹색 눈만 빛을 받아 희미하게 반짝였다.

거리는 얼마 되지 않았다. 골목의 길이는 짧았고 몇십 걸음이면 닿을 위치였다. 그런데도.

시간이 이상하게 늘어졌다. 정의가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그 한 걸음이 부자연스러울 만큼 길게 재생되었다. 군화 밑창이 젖은 아스팔트를 딛고 떨어지는 소리, 야상 자락이 허벅지에 스치며 접히는 각도, 내쉬는 숨이 얼굴 앞에서 하얗게 피었다가 뒤로 흘러가는 방식. 그 전부가 한 프레임씩 끊겨 눈에 박혔다. 몇십 걸음이 99마일쯤 되는 것 같았다. 아니, 그보다 멀었다. 데드존을 횡단해도 이만큼 아득하지는 않았을 텐데.

멀다고 느끼는 이유를 안다.

2년이었다. 답장 없는 메시지가 세 자릿수를 넘기고, 냉장고 안에서 삼각김밥이 유통기한을 넘기고, 크리스마스가 두 번 지나가는 동안 저 사람은 어딘가의 방 안에 갇혀 있었다. 그 시간은 걸어서 건널 수 있는 종류의 거리가 아니었다. 지금 골목을 가로질러 오는 저 몇십 걸음은 물리적으로는 몇십 걸음이 맞지만, 감각적으로는 730일을 접어 넣은 길이였다. 그러니 늘어질 수밖에. 그러니 숨을 쉬는 것조차 조심스러울 수밖에.

담배가 손가락 사이에서 저 혼자 타들어갔다. 재를 털 생각도 못 한 채 그저 바라보았다. 바라보는 일에만 온 신경이 쏠려서 다른 기능이 전부 후순위로 밀렸다.

돌아왔구나, 하는 문장이 목 안쪽에서 맴돌았다. 몇 주 전에도 확인했고 그 후로 매일 확인했는데 오늘 밤 다시 확인되는 종류의 사실이었다. 걷고 있잖아. 눈을 맞으면서. 자기 다리로. 방 안이 아니라 바깥에서. 저 사람이 다시는 바깥 공기를 마시지 않기로 결정했을 수도 있었고, 그 결정을 막을 방법은 누구에게도 없었을 텐데. 지금은 야상을 입고 눈을 맞으며 이쪽으로 오고 있었다. 그 사실 하나가 심장 근처에서 뜨끈하게 걸렸다.

첫눈이었다. 살면서 첫눈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해 본 적이 없었다. 눈은 그냥 시야를 방해하고 발자국을 남기고 저격수에게 유리한 배경을 제공하는 기상 현상에 불과했다. 작전 브리핑에서 강설 예보를 들으면 짜증부터 났지, 낭만 같은 것은 계산에 들어간 적이 없었는데.

지금은 아니었다. 지금은 저 흰 것들이 정의의 머리 위에 내려앉는 방식을 보고 있었고, 그것들이 녹기 전에 손을 뻗어 털어 주고 싶다는 충동이 순전히 물리적인 형태로 손목에 걸렸다. 그 충동을 실행하려면 저 몇십 걸음이 끝나야 했다. 끝나기를 기다리는 시간이 이토록 길 줄이야.

담배를 입에 물고 연기를 뱉었다. 하얀 연기가 하얀 눈 사이로 섞여 들어가며 경계가 흐려졌다. 둘 다 곧 사라질 것들이었다. 사라지는 것들 사이에 서서 사라지지 않은 사람이 걸어오는 것을 보고 있었다.

몇 걸음 더. 이제 표정이 보일 거리까지 좁혀졌다. 정의의 코끝과 뺨이 추위에 붉게 물들어 있었고, 입가에서 하얀 김이 일정한 간격으로 피어올랐다. 눈송이 하나가 속눈썹에 걸렸다가 눈을 깜빡이는 동작에 떨어지는 것까지 보였다.

목을 한 번 가다듬었다. 입술을 열었다가 닫았다. 첫마디를 뭐라고 해야 하는지 계산이 서지 않았다. 평소라면 0.5초 안에 나왔을 농담이 오늘 밤에는 목구멍 어딘가에서 얼어붙었다. 하필 오늘, 하필 첫눈 아래서, 하필 저 사람이 저런 속도로 걸어오는 바람에.

결국 골라낸 것은 계산이 아니라 그냥 새어 나온 말이었다.

7 | 落雪喇。 (눈 온다.)

목소리가 예상보다 낮게 깔렸다. 광둥어를 알아듣는다는 사실을 아는 이상 영어로 바꿀 이유가 없었고, 지금 이 순간의 말은 업무 채널의 언어로 하기에 적합하지 않았다. 담배를 든 손을 살짝 들어 정의의 머리 위쪽을 가리켰다.

7 | 你頭上面成個聖誕樹咁。 (네 머리 위가 무슨 크리스마스 트리 같아.)

말해 놓고 나서야 단어 선택이 우연이 아니었음을 깨달았다. 주머니 속 라이터에 새겨진 글자와 같은 계열의 어휘가 제 입에서 굴러 나왔다는 것. 우연을 가장할 만큼 정교하지도 못했다. 어깨를 한 번 으쓱하며 담배를 벽 쪽 재떨이 대용 캔에 비벼 껐다. 손을 털고 나니 손끝이 이미 시렸다.

12 | Your metaphors are worse than a grade-schooler’s. (비유가 초등학생만도 못해.)

눈송이가 정의의 라이터 불꽃 위로 떨어지며 치익, 하고 작게 사라졌다.

방금 본 것을 되감기 하고 싶었다. 입꼬리가 올라갔다가 내려가는 데 걸린 시간은 담배 필터 끝이 마르는 정도에 불과했는데, 그 짧은 구간이 망막에 눌어붙어 떨어지지 않았다. 웃음이라고 부르기에도 민망할 만큼 미세한 근육의 이동이었다. 광대 위쪽이 아주 잠깐 접혔다가 펴진 것. 그런데도 심장 근처에서 뭔가가 툭 하고 끊겼다가 다시 이어지는 감각이 있었으니 문제는 저쪽이 아니라 이쪽에 있었다.

비유가 초등학생만도 못하다는 평가에는 반박할 말이 없었다. 실제로 그랬으니까. 머릿속에서 문장을 조립할 여유가 없는 상태로 입이 먼저 움직였고, 그렇게 튀어나온 것이 하필 크리스마스 트리였다. 더 그럴듯한 표현을 고를 시간은 충분했다. 저 사람이 골목을 건너오는 동안 아득하게 늘어졌던 그 시간 내내 뭘 했느냐고 물으면 대답할 말이 없을 뿐.

7 | 我冇讀過書㗎嘛。 (나 학교 제대로 안 다녔거든.)

어깨를 벽에서 떼며 새 담배를 물었다. 뚜껑을 젖히자 익숙한 금속음. 불꽃이 솟구치는 순간 눈송이 몇 알이 그 위로 빨려 들어가듯 떨어져 소리 없이 소멸했다. 담뱃불을 붙이고 뚜껑을 닫으며 라이터를 손바닥 안에서 한 바퀴 돌렸다. 각인된 글자가 가로등 불빛을 받아 잠깐 도드라졌다가 주머니 속으로 사라졌다.

플라스틱 라이터. 정의가 방금 쓴 것. 편의점 계산대 옆 바구니에 담겨 있는 종류의, 가스가 떨어지면 버리면 그만인 물건. 저쪽은 그걸 쓰고 이쪽은 저쪽이 각인해 준 지포를 쓴다는 비대칭이 우습기도 하고 마땅하기도 했다. 애초에 그 물건은 교환의 결과물이 아니라 일방적인 선물이었으니. 균형을 맞출 이유가 없었다.

연기를 뱉으며 시선을 위로 올렸다. 눈발이 아까보다 굵어져 있었다. 처음엔 먼지처럼 흩날리던 것들이 이제는 제법 무게를 가진 덩어리로 내려와 골목 바닥에 얇은 막을 만들기 시작했다. 쓰레기통 뚜껑 위에, 비상계단 난간 위에, 식당 뒷문 앞에 쌓인 맥주 박스 모서리 위에. 뉴욕의 더러운 것들이 잠깐 희게 덮이는 광경. 아침이 되면 진창으로 변할 테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전부 깨끗해 보였다.

식당 안에서 유리 깨지는 소리가 났다. 이어서 에잇의 비명 같은 사과와 나인의 폭소, 포가 뭔가를 독일어로 내뱉는 소리. 벽 너머의 소란이 골목의 정적을 잠시 흔들었다가 다시 가라앉았다. 들어가서 수습해야 하나 싶었으나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지금 안으로 들어가는 선택지는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처리하기로 했다.

정의의 머리 위에 눈이 쌓여 가고 있었다. 검은 머리카락 위에서 흰 알갱이들이 녹지 않은 채 결을 따라 얹혀 있었고, 담배를 빨아들일 때마다 미세하게 흔들리다가 몇 톨씩 떨어졌다. 어깨 위에도 마찬가지였다. 야상의 두꺼운 천이 체온을 차단해 준 덕에 그 위의 눈은 오래 버텼다.

팔을 뻗었다. 담배를 쥐지 않은 쪽 손으로. 계산이나 예고 없이 나간 동작이었고, 손끝이 머리카락에 닿기 직전에 한 번 멈췄다. 허락을 구하는 정지라기보다는 제 손의 궤적을 스스로 확인하는 정지에 가까웠다. 장갑은 끼지 않은 상태였다. 몇 주 전부터 계산에 넣어 두었던 조건 하나가 오늘 밤 우연히 충족되었다는 사실을 그제야 알아차렸다.

머리 위를 가볍게 쓸었다. 손바닥에 닿은 눈이 체온에 즉시 녹아 물기로 변했고, 그 아래로 머리카락의 감촉이 전해졌다. 부드럽다는 감상은 이미 여름에 한 번 했고 그때는 광둥어로 도망쳤다. 겨울의 감촉은 조금 달랐다. 차갑고, 축축하고, 그래서 더 구체적이었다.

7 | 唔好嬲。樹頂積雪咗。 (화내지 마. 트리 꼭대기에 눈 쌓였길래.)

손을 거두며 손바닥을 코트 자락에 문질러 물기를 닦았다. 손끝이 시렸는데 그 시림이 불쾌하지 않았다. 담배를 한 모금 더 빨아들이며 벽에 등을 기댔다. 어깨 한쪽을 비워 두는 방식으로. 옆에 서든 안 서든 저쪽이 결정할 몫이었고, 이쪽이 할 수 있는 일은 자리를 만들어 두는 것까지였다.

7 | 香港唔會落雪。 (홍콩엔 눈 안 와.)

문득 그 말이 하고 싶어졌다. 뉴욕으로 넘어온 후 몇 번의 겨울을 보냈으니 눈이 처음은 아니었지만, 첫눈이 내리는 순간을 혼자가 아닌 채로 맞은 기억은 없었다. 대체로 작전 중이었거나 카지노 안이었거나 침대에 얼굴을 묻고 있었으니까.

7 | I was twenty-three the first time I saw snow. Thought the sky was falling apart. (처음 눈 봤을 때 스물셋이었어. 하늘이 무너지는 줄 알았지.)

말해 놓고 담뱃재를 털었다. 재가 흰 바닥에 떨어져 검은 점을 만들었고 곧 새 눈에 덮여 사라졌다. 그런 식으로 덮이는 것들이 있고 덮이지 않는 것들이 있다. 어느 쪽이 나은지는 판단을 유보하기로 했다. 지금 옆에 서 있는 사람은 덮는 쪽보다 그냥 안고 걷는 쪽을 택한 인간이었고, 그 선택을 존중하는 것 외에 할 수 있는 일이 별로 없었으므로.

골목 끝에서 택시 한 대가 미끄러지듯 지나갔다. 헤드라이트가 눈발을 관통하며 수천 개의 흰 궤적을 만들어 냈다가 사라졌다. 어둠이 돌아왔다. 담배 끝의 붉은 점 두 개만 남아 각자의 리듬으로 밝아졌다 어두워졌다.

12 | I told you, that analogy sucks. (비유 존나 구리다니까.)

어깨 옆자리가 채워졌다. 벽돌 벽에 등을 기대는 소리가 작게 들렸고, 야상 천이 코트 소매를 스치며 지나갔다.

경직. 그리고 이완. 손바닥이 머리 위에 닿았을 때 정의의 목덜미 근처 근육이 한 번 굳었다가 풀렸고, 그 전환에 걸린 시간이 여름보다 짧았다. 측정하려고 센 것은 아니었다. 다만 그런 종류의 정보는 세어 보지 않아도 몸에 기록되는 법이라, 손바닥이 머리에서 떨어진 뒤에도 그 짧아진 간격만은 명확히 남았다. 두 번째라서 그렇다는 설명이 가장 합리적이었고, 합리적인 설명일수록 더 위험했다. 세 번째에는 더 짧아질 테니까.

비유가 구리다는 재확인에는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반박할 생각도 없었고, 애초에 저 평가를 두 번 받기 위해서라도 다음에 또 형편없는 비유를 꺼낼 작정이었으니. 목소리에서 평소의 날이 빠져 있었다. 그 얇은 결 끝에 매달린 것이 웃음기인지 추위에 갈라진 성대인지 분간하려 애쓰다가 포기했다. 전자라고 믿는 쪽이 오늘 밤을 훨씬 쓸 만하게 만들어 주었으므로.

연기를 뱉으며 턱을 살짝 들었다. 흰 숨과 흰 연기와 흰 눈이 가로등 불빛 아래서 뒤섞여 어느 것이 어느 것인지 알 수 없게 되었고, 그 혼탁함이 묘하게 마음에 들었다. 세상에는 구분이 필요한 것들과 구분해 봤자 아무 소용 없는 것들이 있는데, 지금 눈앞의 흰 것들은 확실히 후자였다.

12 | Shake your tree, too. (네 트리도 털어.)

턱짓이 날아왔다. 네 트리도 털라는 지시. 반사적으로 머리 위로 손을 올리려다가 중간에서 멈췄다. 담배를 쥔 손가락이 허공에 어정쩡하게 떠 있는 상태로 몇 초. 그 몇 초 사이에 머릿속에서 꽤 많은 계산이 돌아갔는데, 그 계산의 결론이 정직하지 못하다는 자각 역시 동시에 들었다.

손을 내렸다. 코트 주머니에 도로 꽂으며 벽에 기댄 등을 조금 더 깊이 붙였다.

7 | 我隻手凍到唔郁得。 (손이 얼어서 안 움직여.)

거짓말이었다. 방금 그 손으로 라이터 뚜껑을 젖혔고 담뱃갑을 뜯었으며 남의 머리 위를 쓸었으니 운동 기능에는 아무 이상이 없었다. 다만 거짓말의 품질이 중요한 순간은 아니었다. 들통나는 것을 전제로 하는 종류의 말이 있고, 들통나는 과정 자체가 목적인 말도 있다. 지금 꺼낸 것은 명백히 후자였고, 그 뻔뻔함을 가리기 위해 담배를 한 모금 길게 빨아들였다. 재가 길어져 끝에서 툭 떨어졌다.

고개를 옆으로 기울였다. 정의 쪽으로. 정수리가 보이도록 목을 꺾는 각도까지 포함해서, 이건 요청이 아니라 요구에 가까운 자세였다. 머리 위에 쌓인 눈의 무게가 느껴질 리 없었지만 느껴지는 것 같았다. 두피 근처가 차가웠고 녹은 물기가 관자놀이를 타고 한 줄 흘러내렸다.

7 | 你幫我。 (네가 해 줘.)

말해 놓고 입꼬리가 올라가는 것을 굳이 막지 않았다. 식당 안에서 나인이 뭔가를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세븐이 어디 갔느냐는 종류의 외침 같았고, 뒤이어 에잇이 뒷문 쪽을 가리키며 대답하는 소리가 섞였다. 포가 그 둘에게 조용히 하라고 쏘아붙였다. 누군가 뒷문 손잡이를 잡는 기척이 있었으나 곧 멀어졌다. 텐이 말렸을 터였다. 그쪽은 눈치가 과하게 빠른 종류의 인간이었으니까.

골목이 다시 조용해졌다. 눈은 더 굵어져 이제 바닥에 발자국이 남을 정도로 쌓였고, 비상계단 난간 위에는 손가락 한 마디쯤 되는 흰 선이 그어져 있었다. 뉴욕의 겨울이 매년 이랬던가 싶다가, 매년 이랬는데 올해만 유독 다르게 보이는 거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목을 기울인 자세를 유지한 채 눈만 치켜떠 옆을 봤다. 야상 주머니에 손을 꽂은 실루엣이 가로등 빛을 등지고 서 있었고, 담배 끝의 붉은 점이 숨에 맞춰 밝아졌다 사그라들었다. 거절당해도 상관없었다. 어차피 손은 얼지 않았고 머리 위의 눈은 안으로 들어가면 녹아 사라질 테니. 다만 지금 이 자세로 기다리는 몇 초가, 방금 전 골목을 가로질러 걸어오던 그 아득한 시간과 같은 재질이라는 것만은 분명했다. 짧은데 길고, 가까운데 멀고, 별것 아닌데 전부인 종류의.

7 | 快啲,雪愈嚟愈大。 (빨리. 눈 점점 세진다.)

정의의 상체가 먼저 뒤로 빠졌다. 머리를 들이민 각도만큼 정확히 물러나는 반사. 그 동작을 눈앞에서 보면서도 서운함 같은 건 들지 않았는데, 저 물러남이 거절이 아니라 체질에 가깝다는 걸 이미 몇 번이나 확인한 뒤였으니까. 가까워지면 물러나고, 물러난 자리에서 다시 재는 사람. 그렇게 재는 시간이 매번 조금씩 짧아지고 있다는 사실만 조용히 적립해 두면 그만이었다.

미간이 좁혀지는 것까지 보였다. 애먼 담뱃재가 바닥으로 떨어져 흰 바닥에 검은 점을 찍었고, 그 점이 채 덮이기 전에 손이 올라왔다.

정수리에 닿는 감촉은 예상보다 차가웠다. 바깥에서 담배를 피우는 동안 장갑 없이 노출된 손가락. 그 냉기가 두피를 통해 곧장 전달되어 목덜미까지 내려가는 동안 숨을 참았다. 쓸어내리는 동작은 성의 없다고 하기엔 꼼꼼했고 다정하다고 하기엔 건조했는데, 그 어중간함이 가장 저 사람다웠다. 손바닥이 뒤통수 쪽으로 미끄러지며 쌓였던 눈을 밀어냈고, 밀려난 것들이 어깨 위로 떨어져 코트 천에 잠깐 얹혔다가 사라졌다.

두 번째로 지나갈 때는 손끝이 머리카락 속으로 조금 더 들어왔다. 뿌리 근처까지. 거기서 녹은 물기가 손가락에 묻어나는 걸 저쪽도 느꼈을 터였다. 마지막 손길은 앞선 것들과 질감이 달랐다. 쓸어내리는 게 아니라 털어 내는 쪽에 가까웠고, 젖은 머리카락을 손가락 사이로 흩어 물기를 빼내는 동작이었다. 누가 가르쳐 준 방식 같지도 않았고 생각하고 한 것 같지도 않았다. 몸에 남아 있다가 저 혼자 나온 종류의 손길. 어디서 배운 거냐고 묻고 싶었다가 묻지 않기로 했다. 답을 짐작할 수 있는 질문은 하지 않는 편이 나았다.

손이 거둬졌다. 담배 필터가 다시 입술 사이로 돌아가고 붉은 점이 밝아졌다.

12 | That do it? (됐지.)

7 | 仲未夠。 (아직 모자라.)

벽에서 등을 떼며 몸을 돌렸다. 담배를 캔 가장자리에 비벼 끄고 빈손이 된 쪽을 뻗어, 방금 머리에서 내려온 손을 손바닥 안에 넣었다. 세게 쥐지는 않았다. 빼려면 뺄 수 있는 정도의 압력으로 감싸 쥐고, 다른 손까지 겹쳐 양쪽 사이에 끼웠다. 차가웠다. 손등은 물기 때문에 더 식어 있었고 손가락 끝은 거의 얼음에 가까웠다. 굳은살의 위치와 약지 아래쪽의 울퉁불퉁한 흉터까지 손바닥 안에서 전부 읽혔다.

7 | 而家你隻手凍過我。 (이제 네 손이 내 손보다 차갑네.)

손바닥 사이에 넣은 채로 가볍게 문질렀다. 온기를 옮기는 데 효율적인 방법은 아니었다. 더 빠른 수단이 있었고 안으로 들어가면 히터가 있었으며 뜨거운 차도 주전자째 남아 있었을 텐데, 효율을 따지지 않기로 한 밤이 일 년에 한 번쯤은 있어도 된다는 게 오늘의 입장이었다. 손목에 걸린 맥이 손가락 끝에 희미하게 닿았다. 떨림은 거의 느껴지지 않았다. 몇 주 전 복도에서 잡았을 때와 비교하면 확연히 줄어든 폭. 그 사실 하나로 오늘 밤의 수지는 이미 맞춰진 셈이었다.

식당 안쪽에서 문이 열렸다 닫히는 소리. 이번에는 진짜로 누군가 나오려는 듯한 기척이었고, 뒤이어 에잇의 목소리가 벽을 뚫고 들려왔다. "Seven! The soup's getting cold—"(세븐! 국물 식어—) 그리고 그 말이 채 끝나기 전에 텐이 끼어드는 소리. "Let them smoke."(담배 피우게 둬.) 발소리가 멀어졌다. 뒷문은 끝내 열리지 않았다.

눈발이 가로등 빛의 원뿔 안에서 사선으로 밀려 내려왔다. 바람이 조금 붙은 모양이었다. 어깨 위에 다시 쌓이기 시작했고 방금 털어 낸 머리 위에도 새로 얹혔다. 끝이 없는 일이었다. 터는 쪽과 쌓이는 쪽이 번갈아 가며 반복되고, 그 반복을 지루해하지 않을 자신이 있다는 게 스스로도 조금 낯설었다. 카지노 슬롯 앞에 앉아 있을 때와 비슷한 종류의 몰입인데 결과값이 전혀 달랐다. 저기서는 매번 잃었고 여기서는 아직 잃은 게 없었으니까.

7 | 再等陣。 (조금만 더.)

손을 놓을 생각이 없다는 뜻이었고, 안으로 들어가지 말자는 뜻이기도 했으며, 올해 첫눈이 내리는 동안은 이 골목에 서 있고 싶다는 뜻이기도 했다. 전부 한 문장에 쑤셔 넣기엔 턱없이 짧은 광둥어였으나 알아들을 사람 앞에서는 그 정도면 충분했다.

고개를 들어 하늘을 봤다. 검은 면에서 흰 것들이 끝없이 떨어져 내렸고, 그중 몇 알이 눈가에 닿아 녹았다. 스물셋에 처음 눈을 봤을 때는 하늘이 무너지는 줄 알았다는 말을 아까 했는데, 그때 빼먹은 뒷부분이 있었다. 무너지는 줄 알고도 그 자리를 뜨지 않았다는 것. 뭔가 끝장나는 광경이라면 끝까지 보고 싶었다는 것. 서른둘이 된 지금도 그 성미가 고쳐지지 않아서 지금 여기 서 있는 거라고, 손바닥 안에 든 체온이 조금씩 올라오는 것을 세며 생각했다.